유명 달리한 악우들 산악정신 기리는 길
93년 청암산우회 개척…87년 죽음의 계곡서 사고 당한 회원들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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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형제길 제4피치. 황금희씨 너머로 천불동계곡과 침봉군이 바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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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삼형제길은 거벽등반 훈련장 격인 적벽(赤壁)과 피너클(침봉), 장군봉을 잇는 암릉이다. 설악산에서도 경승지로 이름난 비선대 맞은편에 있는 이 삼형제길은 소공원에서 도보로 1시간도 안 걸릴 만큼 접근이 용이하고, 고도감과 스릴이 넘치면서도 중급 수준이면 리드할 수 있을 만큼 난이도가 적당한 데다 천불동을 비롯해 외설악 일원이 한눈에 조망될 만큼 풍광이 뛰어나 클라이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화려한 조망과 암릉등반의 묘미를 제공하는 루트지만, 개척 동기는 유쾌하지 못하다. 올해로 39주년을 맞은 청암산우회는 74년 도봉산 선인봉에 물개길을 개척하는 등 창립 이후 활발한 등반활동을 펼쳐왔고,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 87년에는 알프스 3대 북벽 원정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원정을 앞둔 87년 1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동계훈련 중이던 경일현 대장과 성성모·박용찬 대원이 눈사태에 묻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삼형제길은 바로 이들의 산악정신을 기리고자 청암산우회 회원들이 개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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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련미를 과시하며 제2피치를 등반하는 황기수씨. / 취재등반을 이끌어준 황기수씨와 황금희씨. / 비선대산장 옥상에서 바라본 장군봉(왼쪽)과 적벽. 삼형제길은 맨 우측 적벽 오른쪽 벽을 타고 오르면서 시작된다. 가운데 암봉이 피너클 구간의 최고봉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 달마봉도 솟고, 울산암도 솟고…
밤늦게 비선대산장에 도착, 첫 만남의 인사를 나눈 일행은 이튿날 아침 삼형제길 개척자인 황기수씨(41·엑셀시오 도봉점), 퇴계로에서 헥사 실내인공암장을 운영하는 황금희씨(여·41)와 등반에 나섰다. 삼형제길 개척은 91년 여름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작 루트가 완성된 것은 93년 여름이었다. 황기수씨는 “첫 번째 봉인 적벽 등로를 찾는 데 기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비선대산장을 출발한 것은 오전 8시30분경, 접근로는 적벽과 마찬가지로 와선대쪽으로 가다가 다리 건너서자마자 사면으로 올라붙어야 한다. 그런데 황기수씨는 적벽쪽으로 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뒤편으로 돌아가는 등 우왕좌왕한다. 하도 오랜만에 와서 헷갈렸던 것. 가까스로 길을 찾고 데드르형 바윗골을 타고 적벽 동릉 출발기점에 닿자 황기수씨는 잠시 쑥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제1피치는 초등자답게 물 흐르는 듯 부드럽게 오른다.
적벽 동릉은 멀리서 보면 암릉이라 표현할 수 있지만 실상은 벽이나 다름없다. 황기수씨는 93년 개척보고 때 참가한 클라이머들이 “이게 무슨 암릉이냐 암벽이지”라며 한 마디씩 해댔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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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피치에서 피너클 구간으로 접근하는 황금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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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을 따라 첫 피치 중간쯤 올라설 즈음 바위틈에 구절초가 하얀 꽃을 피운 채 가을바람을 즐기고 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크랙을 잡아당기며 작은 홀드를 이용해 제1피치 종료지점에 올라서자 발아래 비선대 일원이 시끌벅적하다. 비선대는 부지런한 탐승객들로 이른 시간부터 붐비고 있었다. 주변 풍광도 대단하다. 골 밖으로 권금성과 노적봉이 기품 넘치는 웅자를 자랑하고, 천불동계곡 일원에는 천화대, 칠형제봉을 비롯해 침봉과 암릉들이 날카로운 자태를 뽐내며 솟구쳐 있다. 햇살이 스며들면서 그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단풍은 푸른 숲속에서 화려하게 빛났다. 설악은 새날을 맞아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었다.
제2피치. 우측 암각 뒤편으로 넘어서는 순간 골짜기 끄트머리에서 달마봉이 치솟는다. 설악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데드르형 바윗골 안에 발달된 크랙을 이용하면서 제2피치 종료지점에 닿자 황기수씨는 “이제 제3피치만 넘어서면 한층 수월해진다”며 주마링이 힘겨워 얼굴이 허예진 정정현 기자를 안심시킨다. 그러자 황금희씨는 “2주 전 암장 식구들이 여기서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1시간 이상 헤맸다”며 동갑내기인 황기수씨에게 “길 잘 찾아 고생시키지 말라”고 당부한다.
제3피치의 키포인트는 출발점에서 5m 위쪽에 있는 나무를 지나 곧장 뻗은 크랙에서 벗어나 좌측 크랙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 크랙을 7~8m 오르면 페이스가 나타난다. 가슴이 닿을 만큼 가파른 벽이지만 턱을 넘어서기 전 볼트가 박혀 있어 안전하게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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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피치 종료지점. 서너 명이 모여 설 수 있는 확보지점이다. / 황기수씨가 더블 빌레이를 보는 가운데 제2피치 종료지점을 향해 등반하는 취재팀. / 제4피치 등반. 고도감 넘치는 슬랩이지만 바위면이 살아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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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을 올라서는 순간 바람에 몸이 날린다. 동해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우리를 천불동계곡으로 떨어뜨릴 기세다. 그런데도 불안하지 않다. 소와 담에 잠겼다 다시 흘러내리는 계곡 물줄기는 은빛으로 반짝이며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위틈에 사는 야생화들은 더욱 경쾌하고 정열적으로 몸을 흔들어댄다. 하얀 구절초도, 노란 두메부추도, 하얀 솜다래도 가을바람과 햇살에 흥이 넘치나 보다. 덩달아 우리의 로프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덩실거린다. 이제 울산암도 짙푸른 장군봉 능선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우리가 부러운가 보다. 이런 풍광을 보기 위해 바위꾼들이 설악의 암릉을 오르는 것이리라.
적벽, 피너클, 장군봉 합쳐 삼형제길
“제5피치는 의도적으로 이리 길을 낸 겁니다.”
완경사 슬랩 구간인 제4피치를 끝내자 강풍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훈풍이 불어대는데 황기수씨는 짐짓 겁을 준다. 그 역시 오버행 날개바위로 형성된 초반부가 까다로운지 크랙에 프렌드 두 개를 끼워 넣고 바로 위쪽에 다시 한 개를 더 설치한다. 등반능력이 뛰어나거나 혹은 팔힘이 세지 않으면 쉽지 않은 구간이었지만 오버행 구간만 올려치면 평범한 크랙이 볼트 3개에 와이어로프가 걸린 지점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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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피치 오버행 덧장바위. 삼형제길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5.9)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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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적벽 에코길과 크로니길의 종료지점입니다. 제5피치 종료지점은 아니지만 후등자 확보보기가 수월해 일단 여기서 끊는 게 좋습니다.”
적벽 상단부에 올라서 있건만 적벽은 오버행을 이루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대신 좌측 발아래로 계곡을 울리며 물이 흘러내리는 천불동과 비선대가 내려다보인다. 고도감에서 오는 섬뜩한 분위기 속에서 짤막한 암릉을 올려치자 하강포인트. 그 뒤로 날카로운 피너클 구간과 웅장하게 치솟은 장군봉이 감췄던 웅자를 드러낸다.
“우리가 오른 적벽과, 앞에 보이는 피너클과 장군봉을 합쳐 삼형제라 일컫는 겁니다. 물론 87년 죽음의 계곡에서 사고를 당한 선후배들의 넋을 달래자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긴 하지만요. 저기 장군봉을 보면 덧장바위 보이죠, 그 위에서 삼형제길이 끝납니다. 거기서 기존 길과 만나고, 이후 장군봉 정상까지는 기존 길의 연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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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피치를 등반하는 황기수씨. 두 번째 고사목 위쪽에서 피치가 끝난 다음 뒤편으로 들어섰다 다시 정면의 암릉으로 이어진다. / 제5피치 종료지점에서 바라본 피너클과 장군봉. / 고도감 넘치는 피너클 구간. 암릉 오른쪽 숲지대 뒤편이 적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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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과 장군봉은 독립봉이라 할 수 있더라도 피너클 구간은 3개 이상의 침봉으로 이루어져 있어 단일봉이라 일컬을 수 없지만 하나의 봉으로 구분한다고 설명한다. 널찍한 바위 위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20m 길이의 하강을 마치자 황기수씨는 이미 첫 번째 피너클 위에 올라서 있다. 턱과 크랙을 따라 이어지는 제6피치는 쉬운 구간이지만, 종료지점에서 다음 피너클로 넘어가는 짤막한 트래버스 구간은 간담을 서늘케 한다.
“난 못 가.”
세 번째로 등반에 나선 정정현 기자는 트래버스 구간에 들어서자 추락 공포 때문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앞뒤에서 확보를 보고 있지만 떨어지는 날이면 몸이 왼쪽으로 쏠리면서 벽에 부딪칠 게 뻔하니 겁이 날 수밖에. 게다가 수평 크랙을 잡고 몸을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턱을 잡은 왼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몸을 움직이려 하니 뜻대로 될 리 만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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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너클 최상단부. 정상은 대개 우회한다. / 피너클 구간을 지나 장군봉 직전의 안부로 내려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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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피너클을 지나 6m쯤 하강하자 피너클 구간에서 가장 높은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등반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 벌써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다. 출발기점으로 보면 시간이 넉넉했는데 사진 촬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늦어진 것이다. 황기순씨는 황금희씨와 얘기를 주고받더니 이 암봉은 등반성이 별로 없으니 우회하자고 한다.
피너클 좌측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자 마지막 암봉 뒤편의 피너클로 이어진다. 바윗골을 타고 오른 다음 칼날 암릉을 넘어서자 널찍한 바위지대. 이제 적벽이 삼형제 중 막내둥이답게 키도 작아지고 전면에서 보여준 살벌한 풍경도 감추었다. 금강굴 전망대에선 여러 사람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멀쩡한 길 놔두고 뭐 하는 건가 싶은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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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반이 넘어서자 천불동계곡의 수많은 암릉들이 서서히 명암이 뚜렷해지고 침봉 인 등날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 다시 서늘한 바람이 불어댄다. 배낭에 집어넣었던 재킷을 꺼내 다시 껴입는다.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는가 보다.
7m 하강으로 피너클 등반을 끝내고 장군봉 덧장바위에서 제9피치 등반을 시작한다. 이제 적벽과 피너클 암봉이 막내와 둘째 동생처럼 보이고 장군봉은 맏형답게 동생들 옆에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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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피치 장군봉 등반. 등반자 위쪽으로 찢어진 크랙을 타고 올라야 한다.
- “장군봉 구간은 이미 기존 확보물들 있었다”
장군봉 구간에 접어들면서 낡은 볼트와 하켄이 자주 눈에 띈다. 선등자가 어쩔 수 없이 퀵드로를 걸고 자일을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추락한다면 충격을 받아줄지 의문이다. 초입부가 오버행을 이룬 크랙을 올려치자 제9피치 종료지점에서 확보 보던 황기수씨는 “장군봉 벽에 박힌 확보물들은 삼형제길 개척 당시 이미 있던 등반 흔적들”이라며, “그래서 보고회 때 개척이란 말을 쓰는 게 께름칙했다”고 한다.
뒤이어 올라온 정정현 기자의 주마링 모습을 본 황금희씨는 “이제야 주마와 스텝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것 같다”며, ‘오늘의 주인공’이라 치켜세운다. 이어 황금희씨는 하루 내내 앞장서 등반하는 황기수씨에게 “이 정도 슬랩은 슬슬 올라가도 된다”고 했지만 황기수씨는 “이렇게 만만한 데가 오히려 사고 위험이 높다”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완경사 페이스에 좁은 턱과 크랙으로 이어지는 제10피치를 등반할 즈음 해는 공룡릉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고 산은 한낮의 화려함 대신 서늘하면서도 을씨년스런 분위기로 바뀐다. 등 뒤로는 울산암 위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그 오른쪽으로는 동해바다가 시퍼런 물빛을 드러낸다. 산과 바다, 숲과 바위, 계곡과 산릉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화를 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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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팀이 적벽 접근로에서 벗어나 데드르형 바위골을 따라 등반 기점으로 향하고 있다. 고사목 위쪽 공터가 기점이다. / 제9피치 상에 박혀 있는 녹슨 링볼트. 삼형제길 개척 이전에 설치된 것들이다. / 제9피치 레이백 구간. 비선대산장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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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피치를 끝내자 장군봉 전면으로 하강하는 사이 어둠이 골짜기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장군봉 정상까지 오르려던 계획을 제9피치를 시작하면서 접었는데도 마음이 바빠졌다. 깊고 짙푸른 소와 같은 어둠 속으로 한 명 한 명 하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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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수준 2인1조 등반시 하강까지 6시간 소요
적벽 동벽에서 장군봉 기존길 종료지점까지 이어지는 삼형제길은 개척 당시 청암산우회는 총연장 445m에 12피치로 구분해 놓았으나 2004년 여름 전국 암장 답사에 나선 코오롱등산학교 강사팀에 의해 10피치 루트로 수정됐다. 단, 안자일렌 구간은 루트에 넣지 않았다.
삼형제길은 중급 수준 클라이머라면 부담 없이 등반을 시도할 수 있는 루트다. 제5피치 오버행 덧장바위 진입 구간이 까다롭긴 하지만 크랙에 프렌드를 확실하게 끼워 넣는다면 안전에 큰 문제없이 오를 수 있다. 도중에 탈출로도 많은 편이다. 적벽 정상인 제5피치 종료지점에서 안부로 내려선 다음 적벽 전면으로 하강할 수 있다. 피너클 구간이 끝나고 장군봉 등반이 시작되는 안부에서도 탈출이 가능하다.
위치 비선대산장 맞은편.
최고난도 5.9급(제5피치)
소요장비 (2인1조) 로프 60m 2동, 프렌드 1조, 퀵드로 8개, 슬링 등
소요시간 (2인1조) 5~6시간
접근 와선대에서 비선대로 향하다 다리로 내려서기 전 오른쪽 사면으로 올라붙는다. 이후 적벽 등반기점으로 이어지는 허리길을 따르다 갈림목에서 오른쪽 길을 따른다. 데드르형 바위골 위쪽의 고사목 위로 올라서면 제1피치 등반기점인 공터에 닿는다.
하산 제10피치 종료지점에서 20m 하강하여 크랙쪽 하강포인트로 접근한 후, 60m 자일 두 동을 이용해 두 차례 하강하면 장군봉 기존길 출발점으로 내려선다. 50m 자일을 이용할 경우 두 번째 하강시 자일이 빠듯하므로 매듭을 지어 하강기가 빠져나가는 사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강 포인트에 걸린 슬링은 현재 너무 낡아 불안한 상태다.
중급 수준의 클라이머들이라면 장군봉 정상까지 2피치를 더 등반한 다음 약 30m 길이의 하강 세 차례와 짤막한 하강으로 장군봉 남서벽 아래로 내려설 수 있다. 마등령 방향으로 이어지는 장군봉 암릉까지 등반하면 도보로 마등령 등산로로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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